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안 사건 (문단 편집) === 저우언라이의 도착, 장제스의 석방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시안사건 장제스.jpg|width=100%]]}}}|| || [[장쉐량]]과 석방 기념 인증샷을 찍은 [[장제스]]. 두 사람의 사이의 인물은 장제스의 손윗처남인 [[쑹쯔원]].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서안사건 저우언라이.jpg|width=100%]]}}}|| || 장제스와 협상을 마치고 옌안으로 돌아온 [[저우언라이]]. [[마오쩌둥]]도 보인다. || 이때 저우언라이가 시안에 도착했다. 이 무렵 스탈린은 시안 사건은 [[나치 독일]]과 손잡은 [[일본 제국]]이 중국의 [[내전]]을 심화시키려는 술수가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고 "장제스의 납치는 항일 투쟁에 대한 손해다"라고 통보했다. 저우언라이는 [[크렘린]]에서 내려온 평화적 해결책의 임무를 띄고 도착했다. 우선 쑹메이링이 저우언라이와 만나는 것에 동의했고 저우언라이는 쑹메이링에게 장제스야말로 중국의 유일한 지도자감이라고 강조하여 그녀의 환심을 샀다. 저우언라이는 중앙의 항일이 너무 미온적이라고 지적했으나 "우리들은 감금에 관여하고 있지 않다. 장 위원장을 숭배하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다."고 말하며 장제스의 비위를 맞추었다. 쑹메이링은 "만일 위원장을 전국의 영수라고 믿는다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정책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고 저우언라이는 위원장의 난징 송환을 양후청에게 권고할 것을 약속했다. 쑹메이링은 후에 시안사벽 회상록에서 그를 '대국을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나 장 위원장이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유력자'라고 표현했는데 국민당 공식기록에서 저우언라이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탓에 장제스와 저우언라이의 회담이 밝혀지지 않았고 단지 '유력자'와 장제스가 만났다고 되어 있었으나 장궈타오를 비롯한 공산당 쪽의 기록이 밝혀지면서 저우언라이의 존재가 드러났다. 12월 24일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와 만날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교장 선생님이라 불렀고 저우언라이를 만난 장제스는 그를 반겼다.[* 장제스과 저우언라이는 1924년 황포군관학교(국민당군의 사관학교) 설립 당시 교장, 정치부 부주임으로 함께 일했으며, 장제스는 일찍부터 저우언라이의 재능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그러나 1925년 쑨원의 타계 이후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결별했다. 시안 사건을 계기로 어색하게나마 장제스, 저우언라이 두 사람은 10여 년만에 재회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의 내전은 안된다면서 "우린 적이지만 언제나 자네를 생각해왔네. 언젠가 자네와 같이 일할 날이 오길 바라네."라고 말했으며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원들도 장제스를 항일의 영도자로 지지한다고 했다. 다음날인 12월 25일 윌리엄 헨리 도널드가 쑹메이링에게 [[타자기]]를, 장제스에게 [[무릎]][[담요]]를 선물했고 장제스는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쑹메이링이 "위원장은 공산당에 대해서도 관대한 마음을 갖고 있다. 진정한 애국자라면 실행 불가능한 정책을 버리고 중앙의 지도에 대해 성의껏 협력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했고 협상 끝에 장제스는 저우언라이와의 두번째 회담에서 [[중국공산당|공산당]]이나 [[중국국민당|국민당]]이나 같은 [[중국인]]이므로 싸워선 안된다는 결론에 합의했다. 쑹메이링이 [[국공내전]]은 어디까지나 내정의 연장선으로 군사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정치로 해결할 문제라고 거들었다. 마침내 장제스는 구두로 공동 항일전선을 펴겠다는 데에 동의했다. 장쉐량은 쑹메이링의 석방 요구에 양후청이 석방을 반대하며 성문을 지키고 있어 어렵겠다면서 위장하여 차를 타고 뤄양으로 달아나라고 종용했으나 쑹메이링은 "변장해서 도망치는 것이라면 나도 남편도 함께 죽음을 택하겠다."고 거절했다. 쑹쯔원도 협상을 도와 장제스의 무조건 귀환을 설득했고 12월 25일을 계기로 사태가 결정적으로 변화했다. 아침에 쑹쯔원이 장제스를 찾아와 "장쉐량이 난징송환을 결정했다. 먼저 부인을 비행기로 보내고 위원장은 변장해서 장쉐량의 부대에 넣어 때를 보아 비행기로 탈출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장제스는 때를 놓치면 끝장이라면서 중앙군과 동북군이 충돌하면 쑹메이링도 휩쓸릴 것이니 서둘러 탈출하라고 했으나 쑹메이링은 단호히 거부했다. >"내가 위험을 두려워하고 목숨을 아까워했다면 이 곳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온 이상 위원장과 함께가 아니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위원장의 성격을 보아 변장해서 몰래 가는 것 따위는 결코 허락치 않을 것입니다." 오전이 다 가고 점심이 돼서야 쑹쯔원이 양후청이 태도를 바꿀 것 같으나 아직 결정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2시반에 장쉐량이 찾아와 비행기는 준비되었으나 모든 것이 아직 미정이라면서 다시 방을 나갔다. 결국 시간이 늦어 난징에 제 시간에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졌으나 뤄양까지라면 오후 4시에 이륙해서 당일에 도착이 가능했다. 오후 2시에 쑹쯔원이 찾아와 오늘 중에 출발할 것 같으니 준비하라고 했고 장쉐량이 찾아와 양후청이 완전히 동의했단 소식을 3시에 전했다. 뤄양으로 떠나기 전,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기다리라고 하고는 양후청을 불렀다. 30분이 지나 양후청이 나타나자 장제스는 두 사람을 자리에 앉게 하고 자신은 자리에 누워서 훈계했다. >"너희들은 오늘 국가의 대국을 중시하여 나를 난징으로 돌려보낼 결심을 했다. 나에게 문서를 조인하라거나 명령을 내리라거나 하는 강요를 하지 않았으며 또 어떠한 특수한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이는 우리 중화민국이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으로 나갈 절호의 기회일 뿐 아니라 실로 중화민족의 인격과 고상한 문화의 표현이다. 너희들은 이제까지 반동파에게 선동되어 나에 대해 불평등하다든가, 혁명에 불성실하다고 생각해왔다. (...) 사변의 책임에 대해서 말하면 나에게도 또한 책임이 있다. 나는 최고통솔자로서 부하에게 이러한 위법행위를 하도록 한 책임을 지고 중앙에 스스로 처벌을 정하는 동시에 너희들의 회개의 심중도 중앙에 전하겠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일생을 통해 다만 국가의 존망과 혁명의 달성을 위해 살아왔다. 개인적인 원망, 생사, 이해득실을 위해 일을 꾀한 적은 없다. (...)" 훈시 후 시안 공항에 도착하니 4시가 넘어 있었다. 장쉐량은 끝끝내 장제스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난징에 갈 것임을 고집했다. 장제스는 그에게 동북군의 통솔 문제와 장쉐량 본인의 안위를 염려하여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만류했으나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양후청에게 일임한 다음에 장제스과 함께 뤄양으로 이동했고 5시 20분에 뤄양에 도착, 장제스과 같은 숙소에 머무른 다음에 각자 다른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이동했다. 장제스는 군중의 환영을 받았고 도널드에게 차이위 대훈장[* 장제스의 어머니인 왕채옥(왕차이위)의 이름을 따서 제정한 훈장으로 대단한 권위를 자랑하는 훈장이다.]을 수여한 다음에 [[저장성]]으로 휴가를 떠났다. 장제스는 뤄양에 도착한 후 즉각적으로 중앙군에게 작전행동을 정지하라고 명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